바람이 부는 날
가을의 문을 연 바람은 유난히 차갑다. 아직 여름의 더위가 잔뜩 남아 있을 때에도 바람은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를 쓸어내고, 잠시나마 차가운 바람으로 세상을 쓸어낸다. 나는 그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다. 나무들은 금세 노랗고 빨갛게 물든 잎을 흔들며, 그 잎들은 바람에 실려 하늘로 떠오르기도 하고, 내 발밑에 떨어지기도 한다. 떨어진 잎을 밟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 잎이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. 아니, 어쩌면 그 잎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떨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.
때로는 세상 모든 것이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. 바람, 나무, 떨어진 잎 모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,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일 수도 있다.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다 보면 문득 나의 삶도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. 내가 무엇을 하고, 왜 그런 일을 하는지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고, 뭔가 의미를 찾아 헤매고 있지만, 사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나도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. 나 역시 그런 바람이나 나무처럼, 의미를 찾기 위해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.
이제 가을이 깊어간다. 아침에는 서리가 내리고, 낮에는 햇살이 따사롭다. 나무는 점점 더 많은 잎을 떨어뜨리고, 땅은 그 잎들을 받아들인다. 그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이별의 아쉬움을 담고 있는 듯하다.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될 날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. 그렇게 모든 것은 언젠가 끝나게 된다.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다가올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.
어릴 적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. 모든 게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고,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기만 할 것 같았다.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, 그리고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할수록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깨닫게 된다. 친구들이 떠나가고, 부모님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그 끝이란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된다. 그것은 단지 죽음이라는 끝이 아니라, 매 순간 매 순간이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. 모든 것은 바뀌고, 그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간다.
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다. 한 번 불던 바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. 그 바람 속에서 나도 지나가는 한 사람일 뿐이다. 나는 그런 바람처럼, 언제나 변화를 거듭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. 변화는 때로는 두렵고 불안할 때도 있지만, 결국 변화 속에서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. 모든 것이 변할 때, 그 변화 속에서 나만이 남는 것은 아닐 것이다. 나무도, 낙엽도, 바람도 모두 함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.
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고 있다. 바람 속에서 내일의 나를 찾기 위해. 떨어지는 잎을 보며, 그 잎들이 자연스레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내 삶도 그런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있음을 느낀다. 비록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. 하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 역시 다른 이들과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, 내 삶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.
바람 속에 몸을 맡기며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간다. 때로는 너무 많은 생각에 빠져 길을 잃을 때도 있지만, 결국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때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. 어쩌면,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. 시간을 쫓아가지 않으려 애쓰고, 그저 그 흐름 속에서 내가 나일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. 바람이 부는 날, 나는 그렇게 내가 되어가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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